[현대어로 읽는 청오 차상찬] 18. 새롭게 추억되는 이재명 군

[현대어로 읽는 청오 차상찬] 18. 새롭게 추억되는 이재명 군

[현대어로 읽는 청오 차상찬] 18. 새롭게 추억되는 이재명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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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 옛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었고, 일본 제국에서 정2위 대훈위 후작이라는 최고의 작위를 받은 이완용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다 결국 69세를 일기로 병든 잎이 이슬에 젖듯 하루 아침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생명이 다한 것은 올해(1926년) 2월 12일 오후 1시였지만, 그 정신과 혼은 이미 17년 전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융희 3년(1909년) 12월 23일 오전 11시경, 그는 혈기 왕성하던 스물세 살의 청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바로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이재명 군이다. 이재명 군은 원래 평양성 안의 순영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담력이 비범하고 의협심이 강한, 쾌활하고 대담한 채무불이행위험
청년이었다. 그의 눈빛은 아침별처럼 빛났고, 얼굴은 약간 납작하고 길었지만 피부는 희고 깨끗했다. 그는 집안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동서로 떠돌아다니다가 열일곱 살 무렵에는 멕시코로 건너가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언어도 풍습도 전혀 다른 이국 땅에서 백인들의 학대를 견디며 피와 땀을 흘리고 일했지만, 날마다 쇠약해지는 조국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옷깃을 적토지매매계약
실 만큼 눈물을 흘렸다. 그는 멕시코에서 약 2년을 보낸 뒤,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던 동포들과 손을 잡고, 조국을 위해 때로는 분노에 찬 연설을 하고, 청년 남녀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 광무 9년(1905년), 이른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더욱 분개하였고, 조약 체결의 책임자였던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굳게 결심시티은행 담보대출
하게 된다. 개벽 67호에 실렸다 전문 삭제된 차상찬의 글 ‘새롭게 추억되는 이재명 군’ 농협 공인인증서
하지만 그는 여러 해 동안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왔기에,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이완용이 참회하고 새사람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하기도 했다. 겉으로만 보면 이재명은 단순히 일시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저격을 결심한 인물로 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재명이 이완용을 위해 기도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의 도량과 품격이 얼마나 종합신용인증서
깊고 넓은지를 알 수 있다. 그 뒤 융희 원년(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고,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자, 이재명은 더욱 비통해하며 분노했다. 그러나 곧 다시 생각했다. ‘외국에 있어 봤자 소용없는 비탄만 더할 뿐이다. 차라리 조국으로 돌아가 친일 매국노들을 근본부터 뿌리 뽑는 것이 낫겠다.’ 이후 그는 몇몇 동지들과 논의한 끝에, 그해 7월 결광인효현
연히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여러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활동했다. 때로는 기독교인들과도 협력하고, 때로는 천도교 신자들과도 연대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융희 3년(1909) 10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총성은 그의 고막을 강하게 때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이어 같은 해 11월, 일진회 회장 이용구가무직자대출
주창한 ‘한일합방 성명서’는 그의 뜨거운 피를 다시 끓게 만들었다. 이재명 군은 이완용의 죄목(이는 생략함)을 지적하며, 그를 반드시 처단하겠다고 결심했다. 그해 11월 중순에는 경성으로 올라와 천도교 청년인 오복원, 김용문(두 사람은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학생)과 의형제를 맺었다. 또한 그달 하순에는 평양에 들러 박태은의 집에서 김정익, 이동수, 김태선전입세대열람원
, 이응삼 등과 함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논의했다. 이에 앞서 김정익은 한일합방의 주창자인 이용구를 암살할 결심을 품고 있었다. 이재명과 협의하던 자리에서 그는 “이완용보다도 이용구를 먼저 제거하는 것이 옳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에 모든 사람이 만장일치로 이용구를 우선 암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동지인 조창호도 여기에 가담시켰다. 실행 계획에 있어고등학교 성적
, 이재명, 이동수, 김내록 세 사람은 이완용을 암살하는 임무를 맡기로 했고, 김정익과 조창호 두 사람은 이용구 암살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또한 오복원, 박태은, 이응삼 세 사람은 암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김태선과 조창호는 권총을 공급하기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이재명은 다시 목적지인 경성으로 돌아와, 남부의 입개동(지금의 서울 중구 혹은 유학자금 대출
용산구 일대)의 백소사라는 사람 집에 머물렀다. 때는 융희 3년(1909년) 12월 12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고향 평양을 떠난 것도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말할 것은, 그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사상이 격렬하고, 주의가 열정적인 사람이었기에, 마치 대의에 몸을 바치는 의사나 의협심 강한 협객과 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만큼 사랑에 있어서도 그 열정이 많았었다. 그의 부인인 오인성 여사는 당시 스물한 살의 재기 넘치는 여성이었으며, 이재명과는 뜻이 잘 맞았고 정 또한 매우 깊었다. 당시 그녀는 당시 경성 양심여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이재명은 오히려 자신이 몸담고 있던 백소사의 집에 살던 여인, 당시 경성 최고의 기생 중 하나였던 난희와도 정을 나누고 있었다. 이재명은 자신의 일생을 희생하기로 이미 결심한 상태였기에,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동지들과 어울려 술과 노래 속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난희가 비록 황금만능을 노래하고, 의리도 사랑도 모르는 화류계 여인이었지만, 이재명의 호쾌한 말과 협객다운 기개에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의 기생들은 이재명을 단순히 호탕한 청년쯤으로 생각했지만, 난희는 그를 비범한 쾌남으로 여겼다. 그녀는 이재명이 돈이 있든 없든 간에 진심을 다해 그를 위해 온갖 편의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재명은 일에 관해 논하다가 서로 뜻이 맞지 않으면, 총으로 죽이겠다는 극단적인 결심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완용을 습격하기 며칠 전에도 노백린과 함께 난희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난희가 그의 말이 지나치게 격하다며 만류한 일이 있었다. 이재명은 권총을 꺼내 들고 “너처럼 마음 약한 여자는 내 사랑하는 이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당장이라도 그녀를 쏘아 죽이려 했지만, 다행히 노백린의 만류로 제지된 일까지 있었다. (후에 난희도 체포되었다가 무사히 풀려남) 이재명 군은 다시 천도교 청년 김용문을 찾아가 일진회장 이용구를 처단할 계획을 설명했고, 김 군의 승낙도 얻었다. 또한 천도교 중앙총부의 간부였던 양한묵, 최보현, 오상준 세 사람을 만나 그 사실을 전하였다. (그해 봄, 이재명이 김용문과 오복원의 소개로 천도교에 입교한 사실이 있음) 그러나 이 세 사람은 그의 뜻에 전적으로 공감했지만, 장래가 유망한 이재명 같은 사람이 썩어 문드러진 한 인물을 죽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 일이 천도교에까지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며, 아직은 인내하고 나중에 올 더 나은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하였다. (후에 양한묵, 오상준, 최보현 세 사람도 공모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예심 단계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감옥에서 병을 얻어 출옥한 뒤 사망하였다.) 그러나 강철처럼 단단한 이재명 군의 결심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날마다 만나 무기를 손질하고,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선을 면밀히 살폈다. 그들의 집 위치와 집안 내부 형편까지 철저히 조사하며 하루바삐 기회가 오기만을 고대하였다. 같은해(1909년) 12월 22일이었다. 신문에는 이완용이 종현 천주교회당(지금의 명동성당)에서 거행되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이 기사를 본 이재명 군은 ‘천재일우의 기회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은밀히 기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동지인 이동수와 함께, 경쾌한 양복 차림에 권총과 단도를 품고, 이른 아침 여관을 떠나 종현에 위치한 당시 통감부 특허국 진열장(옛 양향청)의 한 귀퉁이에 숨어들었다. (그 시각, 이동수는 도로 아래에서 배회하고 있었고, 김병록은 자전거를 타고 일을 도우려 하였으나 이재명에게 거절당함) 이 사실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다만 자신의 동지, 그리고 하늘과 땅, 귀신들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오전 11시, 종소리가 울리고 추도식이 끝났다. 참석했던 내외국의 인사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줄도 모른 채, 이완용은 마치 맹호의 습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양 떼처럼, 예복과 예관을 갖추고 인력거를 타고, 그 뒤를 호위 순사의 자전거가 따르며 종현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이완용이 그 길을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이재명은, 길 왼편에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품속에 숨겨 두었던 단도를 뽑아,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순식간에 이완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어찌 창해역사가 던진 천근의 철퇴가 진시황이 아닌 수레를 맞추고, 예양의 일곱 번의 살해 시도가 조양자의 말(馬)만 놀라게 할 줄은 어찌 예상했겠는가. 이재명의 매서운 칼날은, 그가 겨냥했던 이완용을 바로 맞히지 못하고, 먼저 그의 앞에 있던 인력거꾼 박원문의 오른쪽 허리 부위 제5늑골을 찔러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하였다. 이후 이재명군은 이완용을 발로 차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핏빛으로 물든 단도로 이완용의 왼쪽 어깨 부위 한 곳을 찔렀다. (그 상처는 깊이 약 16cm, 길이 약 6cm로 왼쪽 폐에까지 상처가 미쳤다) 또한 오른쪽 허리 부위 두 곳(길이 5cm, 깊이 6cm)을 찔렀다. 그러던 중, 이완용을 보호하던 일본인 순사 미야타케 손타로가 허리에 찬 칼로 이재명의 허리 부위에 중상을 입혔다. 결국 이재명은 품속에 감추고 있던 권총을 한 발도 쏘지 못한 채 결국 체포되었다. 그때의 참혹한 광경이란 어찌 형언할 수 있었으랴. 오전 11시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한성의 거리는, 순식간에 공기가 돌변하여 살기로 가득 찼다. 헌병대와 경찰대는 비상소집되어 거리마다 나서서 지나는 이들의 품속을 수색하였고, 인력거꾼 박원문의 유족과 이완용의 울부짖음은 하늘을 찌르고, 땅을 가를 만큼 처절하였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한때 기절하였다가 응급 수술을 받고, 경찰의 보호 아래 대한의원으로 이송되었다. 한편, 체포된 이재명 군은 잠시 이완용 집을 보호하는 순사 주재소에 구금되었다가 곧바로 경시청으로 압송되어 경성지방법원 소속 이토 검사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때 그는 비록 중상을 입고 있었지만, 태도는 침착하고 당당하였으며, 말은 명료하고 또렷하여, 그를 심문하던 재판소 관리들조차도 그의 기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재명은 이후 4개월 동안 예심에 회부되어 있다가, 이듬해인 융희 4년(1910년) 4월 12일, 제1차 공판이 열리게 되었고, 수차례에 걸쳐 공판이 이어지다가 같은 해 5월 18일, 츠카하라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재판정에서 한 최후의 진술은, 여기서 장황히 논하지 않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주의와 신념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고, 그 말들은 방청객은 물론, 재판소와 감옥 관리들마저 감동시켰다. 그중에서도 그는 재판 과정에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며, 동지들은 무죄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또한 자신의 부인이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한 것에 대해 질책하였다. 끝으로 재판장에게 말하길 “나는 살신성인의 뜻으로 정의를 실천한 것이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라며 크게 꾸짖은 이재명의 대의에 모든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그리고 이재명이 법정에서 최후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내가 비록 사형으로 죽는다 해도, 이완용의 숨이 아직 붙어 있는 이상, 귀신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다.”고 한 말에 방청객들은 모골이 송연하였다. 그 후, 5월 21일, 이재명은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고, 상고심에서도 기각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스물네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그해 가을, 그는 장렬하고도 비통하게 단두대에서 순국하였다. 그로부터 슬픔과 찬비가 이어진 17년 동안 이완용은 그 당시 입은 상처로 인해 평생 신음하며 지내다가 금년에 이르러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지하에 있는 이재명이 이를 알고 있을지, 모르고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법정에서 남긴 “귀신이 되어서라도 이완용을 죽이겠다”는 말은 오늘에 와서 실현되었다. 아아, 사람의 일은 만 가지나 되건만 부질없는 뜬구름 같고, 공자도 도척도 결국은 모두 한 줌의 먼지일 뿐이로다. ■ 해설 6월이다. 현충일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에 대한 현대문을 싣는다. 친일파 이완용을 향해 칼을 휘둘렀던 스물세 살의 젊은이, 그에 대한 기록을 차상찬이 들려준다. 이 글은 당시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전문 삭제 당했다. 하지만 정확히 100년이 지난 오늘, 현대문으로 다시 태어나 비로소 공개되는 셈이다. 지면의 한계로 해설은 줄이니 차상찬이 오롯이 말하는 이재명을 느끼길 권한다. 지난 며칠 온통 원문을 현대문으로 바꾸는 데 열중했다. 진즉에 싣고 싶었으나, 대통령 이재명의 호적상 생일을 이 독립운동가의 거사일로 정했다는 소문 때문에 정치색이 물들까 염려했다. 선거는 끝났으니, 이번만큼은 온전히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삶과 정신을 바라봐 주시길 바란다. △현대어 번역·해설=이현준 한림대 강사·차상찬기념사업회 이사 △발췌문헌=차상찬, ‘새로追憶되는李在明君’, ‘개벽’ 67호. 1926. 3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재명 #이완용 #현대어 #이용구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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